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비아 페미니즘 (문단 편집) == 유의점과 의문점 == 본서에서 제시되는 포비아 페미니즘의 논리적 구조는 비단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치적 현상들에 대입이 가능하므로, "우리는 그렇지 않아" 라고 선뜻 말하기 곤란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본서의 254페이지에서 암시하는 바를 고려할 경우, 심지어 저 [[당당위]] 측 남성들의 심리조차도 "유아화된 인정투쟁" 으로서 설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이들까지도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경쟁적으로 피해자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며, 피해자성에 호소하는 것은 본서에서 비판하는 행태에 속한다. 본서는 [[정체성 정치]]에 입각한 [[공포]] 메시지를 배격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득세하면 우리나라도 [[뉴질랜드]]처럼 되어서 남자들 다 [[이민]]가야 한다" 는 식의 메시지에 동조하는 것도 본서의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저자도 인정하듯이 '''사실상 현대사회에서 이런 정치 구호가 아닌 걸 찾기가 더 힘들다.''' 따라서 본서가 긍정하는 것은 단순히 '[[성차별]]을 호소하는 남성들의 항변' 같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젠더전(戰)의 전쟁터에서 '''아예 탈출하는 것이다.''' 포비아 페미니즘에 관한 본서에서의 설명에 대해서, [[나무위키]] 한정으로 다소간 [[사회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첨언하자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실제로 관련연구에 따르면,[* Sibley, Wilson, & Duckitt, 2007.] 우익 [[권위주의]] 성향의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 세상이 범죄가 빈발하는 "위험한 곳" 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반동적인 공포정치에는 좌우가 따로 없다는 본서의 주장과도 맞닿는 면이 있다. 그러나 공포는 개인의 수준에서는 도리어 내집단 순응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 즉, [[2018년 혜화역 시위|혜화동에 실제로 나선 사람들]]의 동기는 공포로는 설명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이 어쨌거나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집합적 효능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저자는 이들의 동기가 단순히 "내 화를 풀어 줘!" 의 유아적 반응에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들이 뭔가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모일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상당히 '대단한' 유아화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혜화동 여성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 안국동의 [[태극기 집회]] 노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과학]] 각 영역들에서는 전통적으로 사회운동을 일으키는 정서는 [[공포]]가 아니라 [[분노]]라고 생각하며, 정서심리학에서는 두 정서의 차이가 "내게는 외부의 위협적 요소에 대응할 자원이 있는가?" 의 판단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정치심리학 분야에서도 사회 운동에 개인이 참여하려면 공포가 아니라 [[분노]]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Frijda, Kuipers, & Schure, 1989.] 여성들이 공포를 느꼈다는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이들은 [[가부장제]]라는 위협요소에 대해서 대항할 자원이 없다고 느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혜화동의 여성들은 오히려 '그런 머리 아픈 것들은 잘 모르는 보통 사람' 으로 남길 바랐을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본서의 설명을 심리학적으로 그대로 차용한다면, 이는 오히려 공포라는 정서보다는 "위협", 구체적으로는 자기위협(self-threat)으로 간주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위협에 대응할 자원이 충분하기 때문에 [[분노]]를 느끼고 혜화동으로 나섰고, (그들 여성들을 결집시키는 대가로서) 또 다른 다수의 '보통 사람' 여성들은 [[공포]]를 느끼고 정치적으로 무력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서의 논리를 다소 다른 학문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페미니즘은 "공포를 먹고 공포를 부추기는" 게 아니라, '''"위협을 먹고 위협을 부추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포비아 페미니즘의 원인을 PC운동과 정체성 정치에 대한 진보진영의 집착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본서의 범위가 아니라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독자들은 이에 대해 "그렇다면 '''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보진영은 '''언제부터, 어째서''' PC운동과 정체성 정치를 자기네 입장에 반영하게 됐는가?" 의 의문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진보진영에서 언제부터 계급에 기반한 의제와 정책들이 힘을 잃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본서만으로는 의문이 해결되진 않는다. 가능성은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원래 진보측이 보수측에 비해서 심리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에 더 민감할 수 있다. 예컨대 《바른 마음》 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J.Haidt)의 도덕성 기반 이론(MFT; moral foundation theory)에 따르면, 리버럴들은 위해 및 돌봄(harm and caring)의 도덕성에 극도로 예민한 경향이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이라면, 저자가 지나가듯 언급했듯이 [[과열 경쟁|무한경쟁의 논리]]를 갖춘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을 인정투쟁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이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서로의 피해자성을 '과시' 하는 우울증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국내 정치지형에 있어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PC운동과 정체성 정치의 기원을 파헤치는 저널리즘적인 탐구까지는 본서에 담지 않았다. 한 가지 제기해 볼 수 있는 의문점이라면, [[여성혐오]]에 관련된 문헌들을 저자가 정확히 조사한 것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252페이지에서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여성혐오가 가부장제와 젠더이원제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면서 "우에노도 왜 여성혐오가 젠더이원제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결과물인지에 대해 책에서 끝까지 설명하지 못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여성혐오의 개념화는 《Between Men》 에서 정립되어 있으며, 두 책 모두 상당히 명확하게 여성혐오를 이론적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브 세지윅의 책은 본서에서 인용하지 않았으며, [[동성사회성]]에 대해서도 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부장제]]와 [[젠더 이분법]]은 말하자면 상관성은 있을지 몰라도, 인과성에 있어서는 사변적 수준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흔히 제시되는 개념이다. 여성혐오는 이브 세지윅의 문예비평 이론에서 출발했기에, 만일 저자가 관련문헌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여성혐오에 대한 여성학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우에노의 책을 읽었다면 세지윅의 책을 안내받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박가분(평론가)|저자]]라면 마땅히 보여주리라 기대되는 지적 열정이 드러나지 않은 점은 다소 아쉽다. 또한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에 [[근대]]성의 역사학적 설명을 덧붙인 인물로, 여성혐오의 공시적 보편성을 주장할 뿐이지 통시적 보편성을 주장한 적은 없다. 물론 우에노가 여성혐오를 [[중력]]에 빗댄 것 때문에 국내 여성학계의 이현재(2018) 등을 비롯하여 동료 학자들의 많은 공격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공시적 보편성에 대한 공격이지 통시적인 의미에서인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근대적 삶의 규범은 중력처럼 보편적이다" 라는 표현이 [[음모론]]적이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우에노의 표현 역시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를 초역사적 존재, 즉 고금을 통틀어 불변하는 상수로 묘사하는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저자와는 달리, 우에노야말로 [[가부장제]]와 [[이성애규범성]], 정상가족,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 [[여성혐오]]가 모두 '''근대국가가 통치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뒤늦게 확립한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논객이기 때문이다. 우에노는 여성혐오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비관주의자라는 것이 대표적인 비판이지만, 여성혐오의 메커니즘에는 적어도 그 경계조건을 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